<오른쪽에서부터 朴正熙 대령, 金昌龍 대령, 李承轍(첩보부대·HID 副대장) 중령, 金宗平 준장, 全在球(전재구·행정장교·후에 국회의원 역임) 대위, 한 명 건너 金根化 상황실장(중령), 한 명 건너 朴璟遠(박경원·첩보부대장·후에 내무부 장관 역임) 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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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末 육군정보학교장(당시 명칭은 제6훈련소장) 시절 朴正熙 대통령(당시 대령)과 金昌龍 특무대장(당시 대령)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발견됐다(사진 1). 이 사진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美 군사고문을 환송하기 위해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장교들이 대구 육군본부 앞에서 찍은 것이다.
여순 14연대 반란이 진압된 후인 1948년 11월, 朴正熙 소령은 좌익 연루자로 지목돼 肅軍(숙군) 수사책임자이던 金昌龍 소령(당시 1연대 정보주임)에게 체포됐다. 수사 과정에서 朴正熙에게 전기고문까지 했던 金昌龍은 朴正熙가 수사에 적극 협조하자 白善燁 정보국장, 金安一 특무과장 등과 함께 朴正熙를 救命하는 데 일조했다. 무기선고까지 받았다가 목숨을 구한 朴正熙는 6·25 발발과 함께 현역으로 복귀, 이 사진 속에서는 金昌龍과 같은 계급의 정보국 소속 장교로 나란히 섰다. 金昌龍은 1953년 준장으로 승진한 朴正熙가 美 포병학교로 유학을 가려할 때, 朴正熙의 좌익경력을 문제 삼아 출국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1956년 1월 金昌龍이 姜文奉 2軍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암살자들에 의해 피살되자 5사단장으로 있던 朴正熙 준장은 『허, 그 사람이 그렇게 죽다니…. 내가 사형받을 뻔했다가 그 사람 덕분에 살아났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23년 후 朴正熙도 金載圭에 의해 암살당했다.
1951년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은 金宗平(후에 金宗勉으로 改名) 준장 (후에 서울신문 전무 역임)이었다. 특무부대(국군기무사령부의 前身)와 첩보부대(국군정보사령부의 前身)는 그의 통제를 받았다. 金昌龍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金宗平은 후일 金昌龍이 조작한 「동해안 반란 음모사건」으로 獄苦를 치렀다.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 당선자가 美1군단 예하 한국군 1사단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도 발견됐다(사진 2). 사진 속에 보이는 제1사단장 朴林恒(박임항) 少將은 朴正熙 대통령의 만주육군군관학교 1년 선배로 5·16 당시 5군단장으로 군사혁명에 참여했다. 그후 1軍사령관·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1963년 3월 民政 이양을 앞두고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그밖에 1952년 대구 육군본부 시절 金鍾泌의 모습이 담긴 것(사진 3)과 1956년경 金鍾泌 등 육군본부 정보국 장교들이 가족과 함께 경복궁으로 야유회를 갔을 때의 사진도 발견됐다(사진 4). 이 사진들은 金根化(김근화) 예비역 육군대령(陸士 5기)이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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